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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유교문화의 본고장 안동의 대표 관광 명소를 안내해 드립니다.
안동은 지역이 넓고 유적 등 볼거리가 많아 가족단위는 물론 연인들이 관광하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아래에 소개해드리는 정보로 안동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안동시티투어 도산서원권역 자료

등록자: 운영자 / 등록일자 : 2017-09-11 오전 10:41:01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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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陶山書院) : 1574년 설립, 1575년 완공 사액됨(사적 제 170호)
ㆍ“해동주자”라 일컫는 퇴계 이황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
ㆍ선조(宣祖)7년(1574) 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선조8년(1575)에 한석봉(韓石峯)이 편액을 하사 하였으며, 광해군7년에 사림(士林)이 월천(月川) 조목 (趙穆:1524~1606)선생을 종향하였다.
ㆍ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영남(嶺南) 유림(儒林)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ㆍ우리나라 4대 서원중의 하나이며 대원군 서원철폐(1868, 고종5년)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서원과 서당의 차이점
서당 - 후학양성(각 마을마다 기초교육기관)
서원 - 후학양성, 선현배향 (서당은 살아있는 선생을모시고 공부하는 곳이며, 서원은 돌아가신 큰 스승을 모신 곳으로 사당이 있고 강학활동과 유림활동의 중심이 되기도함)
서당 - 옛날(초등학교?) 지금은 (초, 중, 고까지)
서원(사립), 향교(국립) - 지금의 대학
성균관 - 중앙연구기관
♣우리나라 4대 서원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도동서원( 대구시 달성군), 옥산서원(경주시 안강읍),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1. 추로지향비
ㆍ공자(노魯나라 곡부궐리), 맹자(노나라 추성) 의 고향이라는 말로서 공자, 맹자와 같이 훌륭한 학자가 배출되어 예절바르고 학문이 왕성한 고장을 칭송해서 부르는 말이다.
ㆍ 공자의 77대 종손인 곡부 공덕성 박사가 상덕사를 알묘(謁廟) 후 느낀대로 소감을 씀(1980. 12. 8)
ㆍ학문과 예의가 있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뜻, 성인이 살고 있는 고장이란 뜻 :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에서는 최고의 찬사

◎열정(冽丼) -찬 우물 이란 뜻
퇴계 선생께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일명 세심장(洗心場)이라 부른다.
도산서원 열정(서원 앞 우물). 퇴계는 우물물이 퍼내면 퍼낼수록 신선하고 맛좋은 물이 샘솟듯이 학문 연구도 같은 이치라고 말 했다. - 주역(周易)정괘(井卦)에서 인용

◎몽천(蒙泉) -산 밑에 나는 샘이란 뜻이며 바르게 가르치다. 라는 뜻이기도 함
도산서당 앞에 있는 샘물이다.·몽이양정(蒙以養正)을 뜻하는 것으로 어린제자를 강명한 스승이 바르게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도산서원 마당(입구)에서 바로보는 관전 포인트
도산서원 모든 공간 석재이든 목재이든 관계없이 방형적(方形的)직선적인 형태 - 퇴계가 늘 주장한 '곧고 반듯하다'는 마음가짐을 이러한 직방의 이미지로 가득찬 공간에서 부지불식간에 체득하기 위한 심리환경적 디자인

도산서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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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산서당 (1557 ~ 1561 : 4년 걸림)
ㆍ 퇴계선생이 직접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제자 310명, 57세에 지어61세에 완성)
ㆍ선생께서 49세때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후학을 양성 하였으나 제자가 너무 많아 장소가 협소하여 승려 법련(용수사)에게 편지로 건물의 설계를지시하여 1557년 착공하여 1561년(4년)에 완성하였다.
ㆍ마루이야기(암서헌 옆에 부설된 마루)
:도산서당 좁아(마당, 돌에 기대기도 ..) 앉을 곳이 없었던 제자(양반집자제)들이 퇴계선생 출타시 급히(사흘만에) 만든 마루이다.
:한강(寒岡)정구선생이 안동부사로 오셨을 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ㆍ눈썹지붕 : 제자들이 만든 마루위의 지붕
ㆍ담 : 원래는 흙담이었고, 담이 낮아서 밖의 경치를 볼 수 있었으나, 1970년 도산서원 성역화로 복원이 잘못됨 (지금의 시멘트담은 서울의 궁, 궁궐 담, 고궁에서 볼 수 있음)

◎ 절우사(節友社) : 사계절을 달리하는 나의 벗(계절을 달리하는 4친구)
➀ 매 화 : 매형이라고 (부름 너무 닮고 싶어서) 눈도 녹지 않은 이른 봄에 핀다(설중매), 3월이 피고 눈이 와도 견뎌낸다 - 고난을 이겨냄을 상징 / 모든 일에서 일찍 시작하라 2015년 부산해운대에 태풍이 왔다 간 후에 외국인 엄마가 자녀 둘과 가장 먼저 청소
➁ 소나무 : 눈이 와도, 시대가 바뀌어도 자기 색을 잃지 않는다.
- 변하지 않는 푸르름, 절개의 상징 / 소나무 잎은 두 가닥 즉 신뢰를 나타냄(전통혼례상에도 올라 감)
*참고 :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는 자식을 놓지 않지만 자식은 힘들면 손을 놓을 수도 있다. 즉 부모님의 신뢰
➂ 대나무 : 부러지지 않음 - 굽히지 않는 절개와 자존심을 상징
➃ 국 화 : 11월에도 피어있다(맨 마지막 까지 피어 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에 핌 ◎ 정우당(도산서당 바로 앞 연못) -인내와 지조 상징이고 군자를 의미함
암서헌 앞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으로 그 곳에 연을 심었다.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를 벗 삼아 혼탁한 사회에서도 선비정신을 꽃 피우겠다는 의지가 바로 정우(淨友)인 것이다.
* 퇴계선생은 연못에 연을 심고 깨끗하다는 ‘정(淨)에, 친구 ’우(友)‘, 제방 당(塘)’ 이라고 쓰고 ‘정우당’
-연밥은 빈틈없이 속이 들어 있고 줄기는 비어있어 불어지지 않는다. 즉 “지식은 채우고 욕심을 버려라”는 의미

ㆍ 투호 놀이를 즐기심 : 똑바로 서서 바른 자세로 던진다.
ㆍ 도산서당에서의 생활 : 잠잘 때 옆으로 손발 적당히 오그리고 잤다.
절대로 책을 등지고 잠자거나 앉지 않았다.(책 놓은 곳 약간 높임)
ㆍ 문설주 이야기
ㆍ 옛날 천원권 지폐 뒷면 도산서원 전경에서... 도산서당이 크게 나온 이유 - 도산서원의 건물 중 가장 가치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3. 농운정사(隴雲精舍)
ㆍ도산서당에서 공부 하는 학생들의 기숙사 건물이다
ㆍ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자 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ㆍ관란헌(觀瀾軒 제자들이 쉬는 마루) :낙동강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의 순리를 터득하였다고함. 물결을 바라보라는 뜻(쉬면서 공부하라)
관란’은 맹자의 진심편에 나오는 말로, 물을 바라보는 법이 있으니, 흐르는 물의 이치를 살핀다는 뜻이다. (휴식공간)

ㆍ시습제(時習齊):공부하는곳 - '학이시습(學而時習) 불역열호(不亦說乎)'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란 뜻이다 나이 든 제자들은 동쪽방, 나이가 어린 제자들은 서쪽방에 기거토록 하여 제자들 간에 서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한다.
ㆍ좌우대칭(건물전체)속의 비대칭(문과 창문)의 아름다움(예:마릴린먼로의 점)
➀ 동쪽 창문이 더 낮다 - 아침 햇빛이 눈이 부셔 빛이 바닥을 치고 들어 오도록...)
➁ 서쪽 창문이 더 높다 - 지는 해를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ㆍ창문(문의 구별법) : 팔걸이, 툇마루가 없다. 문보다 약간 높다(방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4. 상.하 고직사(도산서당과 서원의 관리하던 곳, 살림을 살았던 곳)
ㆍ⊏자 모양 - 겨울에는 사방이 막혀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따뜻하다
- 여름에는 햇볕을 막아줘서 시원하다
ㆍ기둥 밑의 구멍 - 나무(기둥) 썩지 말라고 뚫어 놓은 통풍구이다.(작게 뚫어 놓으면 쥐가 다니면서 나무 갈아먹을 염려 있어 고양이도 다닐 수 있게 조금 크게 들었다고 한다.)
ㆍ아궁이 4개 - 하고직사(도산서당)
아궁이 8개 - 상고직사(도산서원) 아궁이 숫자 - 밥 먹는 사람의 숫자와 비례, 아궁이 많으면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있다.(아궁이 하나에 사람 8~10명 정도

도산서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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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 서 광명실(光明室 : 서고)
ㆍ퇴계선생의 친필 현판(역동서원에 있던 것을 옮김-역동서원의 철폐로) - 도산서원의 모델은 지금 안동대학 내에 있는 역동서원이었다
ㆍ동 광명실 - 퇴계선생이 쓴 책과 그 이전의 책들이 보관
ㆍ서 광명실 - 퇴계선생 이후의 책들 보관 지금은 안동국학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음
ㆍ한자 문화권과 유교 문화권에서는 동쪽이 위(높고)이고, 서쪽이 아래(낮다)이다
ㆍ서고건물이 높이 누각형식으로 지어진 까닭은? - 통풍, 습해방지, 벌레들로부터 책 보호하기 위해서 이다.
ㆍ회화나무 : 회화나무의 수많은 꼬투리 중 절로 소리가 나는 하나가 있는데 그 소리 나는 꼬투리를 가슴에 품고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를 한다고 하여 도산서원에서는 매년 한명이 과거에 급제 한 기록이 있다. *광명실 앞에 있던 회화나무는 고사 하였다.

6. 진도문(進道門) : 도(학문)로 나아간다, 진리를 향해 들어간다
ㆍ북(명고이척지) - 잡인의 출입을 막음
도산서원의 원규를 어기면 두드린다.
ㆍ원규 - 책을 가져 나가지 마라
- 여자 출입 금지
- 술 먹지 말라
- 형벌을 내리지 마라(꾸지람을 하지 마라, 짜증을 내지 마라)-부모님 말씀은 3번을 생각하면 2해가 된다. 즉 짜증을 내지 말고 스승님과 부모님 말씀을 한 번더 생각하라는 것이며 세상사에서도 화가 날 때 3초라도 더 생각하고 행동을 하라는 의미.
(원규를 어겼을 때 규칙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북을 두드려 스스로 깨닫게 함)
퇴계 선생은 충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특별히 월천 조목 선생에게는 충고를 하셨다고 한다.(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하지 않았고, 편지를 108통이나 써서 보냄)

7.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 210호 (늘 지켜야 할 가르침, 가르침을 담당한다는 뜻)
ㆍ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선조7년(1574)건립된 대강당이다.지금의 교실 역할)
ㆍ사액서원 : 임금이 서원이름을 직접 써서 내리거나 당시의 명필이 대신 써서 내림
ㆍ사액서원이 되면...
나라에서 토지, 노비, 책, 현판을 내림 (서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ㆍ도산서원 현판 : 석봉(石峯) 한호 (韓濩)(31살 때)가 어전에서 쓴 글씨 라 한다.
ㆍ한존재(閑存齋) : 원장의 집무실(온돌방)
ㆍ정료대(庭燎臺) : 상석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히는 조명기구(야간에 치르는 제례 때, 서원행사시 쓰임)

ㆍ도산서원 사액현판에 관한 이야기
사액을 내릴 때 선조께서 당시의 명필 한석봉에게 명을 내려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하였는데... 선조께서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한석봉 에게 가르쳐 주면, 놀라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다” 싶어서 가르쳐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한 자 한 자 불렀다고 한다. 한석봉은 영문도 모르고 왕이 부르는 데로 글자를 써내려 갔다.
맨 처음에 원(院)자를 쓰고, 다음에 서(書)자, 다음에 산(山)자, 그리고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했다. 한석봉은 원, 서, 산 자를 쓰고 나서 도자를 쓰려고 할 때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고 있구나” 알아채며 마지막 붓이 떨려 막지막자인 ‘도’ 자는 삐뚤게 쓰여졌다는 이야기... 또 다른 이야기는 ‘도’ 자를 쓸 때 떨고 있던 손을 옆에 있던 대전 내관이 발로 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8. 동 . 서재
ㆍ동재(박약재 博約齋) - ‘학문을 넓히고 예의를 지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요즘 영남 유림의 모임 가운데 박약회 라고 있는데, 여기서 이름을 땀)
ㆍ서재(홍의재 弘毅齋) - 넓고 의연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ㆍ동재가 선배, 서재가 후배(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에서는 동쪽이 위(높고), 서쪽이 아래(낮다)) = 아침에 의관을 정비하고 서로 나와 인사를 한 뒤에 전교당에 올라 공부를 했다

9. 장판각(藏板閣)
ㆍ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관하는 장소(요즘의 인쇄소)
ㆍ선조어필, 퇴계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2,790여장 보관해오다가 2003년 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ㆍ앞면 문 위쪽에는 목판이 썩지 않게 통풍구를 만들었다.

10. 상덕사(尙德司) 보물 제 211호
ㆍ서원의 역할 중 선현배향의 장소
ㆍ퇴계선생과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매년 춘.추(음2.8월 중정일)로 향사(享祀)를 지낸다
ㆍ3개의 문
:오른쪽 문 - 제관들이 출입 하는 문
: 왼쪽 문 - 제수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
:가운데 문 - 귀신이 출입하는 문 / 재사음식이 들어 가는 문
ㆍ문의 태극문양 - 천, 지, 인을 나타냄 태극모양 반대로 되어있다(사후 세계이기 때문에 일상적이다고 생각하여 상가집에 바다 해(海)자 거꾸로 붙이는 이유와 비슷하다.)
ㆍ월천 조목(1524~1606) 퇴계 선생의 수제자. 조선중기 학자. 평생을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도산서원과 봉화의 문암서원등 에 제향되어 있다.

11. 전사청
ㆍ향사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던 곳
ㆍ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가 있다.
ㆍ요즘은 여자가 제사 음식 준비 - 옛날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제사 음식 준비했다.(지금 종가에서도 남자들이 제사 준비하는 곳도 있다.)
ㆍ유교 - 조선말에 많이 변함 - 일제강점기 때 더 많이 바뀜 - 요즘 유교는 일본의 영향이 많다.

12. 옥진각(玉振閣)
ㆍ금성옥진을 줄인 말로 ‘글 읽는 소기는 금소리와 같고 글 떨치는 것은 구슬과 같다’는 뜻이다.
ㆍ1970년대 건립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ㆍ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도산서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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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성학십도 - 퇴계이황이 평생동안 공부하고 연구한 성리학의 핵심내용과 실천 방안이 들어 있는 책 - 퇴계가 68세에 어린 선조(17세의 어린나이 임금이 됨)를 위해 성리학의 요점이 그림으로 정리되어 있다.(성군이 되시라고..) - 조선시대 2~3차례 조정에서 강의 했다고 한다.(요즘의 파워포인트)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퇴계 선생과 선조 사이에 통역이 있었다?
= 퇴계 선생이 사투리를 너무 많이 썼거나 목소리가 작아서...

ㆍ중화탕 - 30여가지 마음을 다스리는 약재(만병통치약?)
ㆍ화기환 - 화를 다스리는 글 예)참은 인자를 3번 꼭꼭 씹어 먹는다.
ㆍ혼천의 - 천채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별자리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왕궁이 아닌 민간 교육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 는 데 의의가 있다
ㆍ서기(책상) - 검은 목조 책상 -가장자리가 많이 닳았다(공부 많이 해서...)
ㆍ청려장 - 푸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 퇴계선생의 키보다 크게 만듦 - 허리가 굽는 것 을 방지하기 위하여...
ㆍ도산십이곡 -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읊은 시조로써 친필 목판본이다.
ㆍ흑단연 - 단계산 흑색 돌로 만든 벼루
ㆍ옥서진과 세지 - 글을 쓸 때 양쪽을 누르던 것
ㆍ매화연 - 단계산 자색 돌로 만든 벼루로써 선생의 문인 김북애의 증정품
ㆍ백자타호와 장추 - 선생이 침을 뱉을 때 쓰던 백자타호, 받침접시 밑에는 山자가 쓰여 있다. 선생이 쓰던 장추(긴빗자루)로써 의이미라는 일년초로 만들었다.
ㆍ매화등(의자) - 매화무니가 있는 청자 의자 : 여름 - 바람이 통해서 시원하고, 겨울 - 밑에 불을 넣으면 따뜻하다.
ㆍ안석 -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으로 길이는 80cm
ㆍ완석 - 왕골로 짠 것으로 3개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 한 개의 뒤에는 ‘이첨지 댁 퇴계’라는 자필 글씨가 있다.

13. 역락서재(亦樂書齋)
ㆍ퇴계의 제자인 지헌(芝軒)정사성(鄭士誠)을 선생에게 취학시킬 때 지헌의 부친(鄭 枓호 :竹軒)이 특별히 지어준 서재겹 기숙사이다.
ㆍ현판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ㆍ현판 역락(亦樂)의 뜻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 즉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인데 역락은 논어에 나오는 문구이다.
󰁴며느리를 개가시킨 퇴계 퇴계 선생의 아들이 스물 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스캔들)이 생기면 자기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돌아보곤 했다.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 선생은 며느리의 방에서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순간 퇴계 선생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시아버지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틈으로 살펴보니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남편 모양의 인형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여보, 한 잔 드세요" 하면서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죽은 남편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껴 우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곰곰히 생각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또 무엇이냐? 저 젊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이런 윤리 도덕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 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딸을 데려가면 친구 사이마저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퇴계 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하여 퇴계 선생은 사돈과 인연을 끊고 며느리를 돌려보냈다. * * * * *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 퇴계 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마침 날이 저물어 한 집에서 묵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 선생이 좋아하는 것 뿐 이었다. 더우기 간까지 선생의 입에 딱 맞았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구나" 그런데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만 올라왔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퇴계 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 집 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가시는 길에 신으라고 주었다. 그런데 신어보니 선생의 발에 꼭 맞았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퇴계선생은 며느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냥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문 뒤에 숨어 떠나가는 선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퇴계 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개가시켜 행복하게 살게 했다. 윤리 도덕을 목숨같이 여기던 그 때 그 시절에....
퇴계 선생은 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이를 과감히 부수고 깨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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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과 은어이야기...
낙동강에는 옛날부터 은어(銀漁)가 많았고, 은어(銀漁)요리는 향기가 있고 맛이 좋아 이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실 진상품으로 일반백성은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진상 시기는 산란전인 7월초라 은어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 석빙고입니다. 원래 예안면 동부리의 한 강기슭에 있었으나 수몰로 인해 지금의 안동댐 민속촌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이 50세까지 하계(下溪)에 살다가 아이들이 멱을 감으며 은어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며 꾸중을 하셨다고 합니다..
법으로 정한 이상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식들이 국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지금 종택이 있는 상계(上溪)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횡성(橫城)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이다.
아버지는 참판대춘(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의 나이로 몸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대과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증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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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사랑한 이황선생의 이야기.
퇴계 선생께서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 지 알아보자.
이황선생은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불렀다. 친근하고 격의없는 친구와 같은 호칭이다.
1.한 일화로 선생이 이질로 설사를 만나 방에 취기가 스며들게 되자 매형에게 미안하다 라고 하고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고 말하고 환기를 시키고 매화분을 정갈히 씻고 닦게 하였다.
2.선생이 죽음을 예견하고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한 후 몸을 깨끗이 하고 앉아서 70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도 매화와 함께 하였다.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식물 -매운 겨울을 지나고 나서 아직 찬기가 맴도는 시정에 힘겹게 꽃송이를 피워 올리는 기개 즉 생활의 궁핍함에도 좌절하지 않고 고고한 기품을 길러내기위해 노력하는 선비의 모습을 추상한다고 생각 함
*참고: 진성이씨 집안 대대로 나무에 대한 사랑: 대종가인 두루마을의 경류정에 600년 된 뚝향나무- 온혜 종가에도 똑같은 뚝향 나무가 있음


* 마무리
이렇게 도산서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안동에는 사립학교인 서원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입니다. 현재에도 선현에 대한 향사를 지내는 서원도 많지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학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안동입니다.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집과 문헌이 발간 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황 선생님의 사상을 생각해 보고 선비정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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