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관광명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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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오면 여기는 꼭 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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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유교문화의 본고장 안동의 대표 관광 명소를 안내해 드립니다.
안동은 지역이 넓고 유적 등 볼거리가 많아 가족단위는 물론 연인들이 관광하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아래에 소개해드리는 정보로 안동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안동시티투어 문화해설 자료

등록자: 운영자 / 등록일자 : 2017-09-11 오전 10:21:32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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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 제물준비하는 곳

장 판 각
■ 병산서원 바로알기
존 덕 사
위패를 모셔둔 사당 : 서애류성룡 선생과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 공
■향사: 음력3월 초정일과 9월 초정일(음력 1일에서 10일사이에 丁 넷째천관

명성재:원장님 전용방

입교당(立敎堂) :유생들이 직접 스승에게 지도를 받는 곳 : 교실 ‘정’ 과 들어간 날)

경의제: 제관이거처하는 방

동직재 - 동재: 유생이거처하는 방-작은 방 유사의 방 *학생장 방

동직재 서재: 작은방:장서실 서책을 보관하는 곳

주사 서원관리인이기거함


만 대 루 - 만(늦을 만)대(대하다 대)루(마루 루) 는유생들의 휴식공간 전면 7칸 옆면 2칸으로써
유생들의 휴식 공간(유생들의 행사 때 개좌석이 되고 바깥 강학처(가르침의 공간)

■ 복례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3가지는? : 여자, 술, 광대

복례문


■서원: 기본적으로 유생들이 모여강당에서 학문하는 강학의 기능과 사우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제향을 기능을 갖춘 곳이다 하지만 서원은 이러한 기능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향촌에 사회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질서를 재편성하여 향촌 지역
공동체를 이끌어간 정신적 지주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형성 된 것으로 성리학이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산물

-고려공민왕이 흥건적난을 피하여 이지방으로 왔을때(몽진)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면학하는 것을 보고 가상하게 여겨 사패지와(농지8백두락) 여러서책 하사, 1573년 서애 병산리로 이간 - 임진왜란 소실 - 서애 사후 7년 1614년에 제자들과 유림에서 중수
-서애선생의 8대손 낙파 류후조가 대원군에게 올린 별지로 훼철이 안 됨.


안동문화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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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문화란 ?
안동문화는 시대별로 편중되지 않고, 종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들이 온전히 전승되어 온 지역으로 면적으로는 서울의 약 2.5배입니다.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지역(지정된 문화재 300여점(건축물 158점) 지정 되지 않은 문화재급 고 가옥 250여동)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양의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유형적 자산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도 많아 남성대동놀이인 차전놀이, 여성대동놀이인 놋다리밟기, 화전싸움, 저전논메기 소리, 내방가사, 행상소리 등 다양하게 전승된다.

안동지역에 이렇게 풍부한 문화유산이 전승되는 것은 안동이 가진 가치 지향적 철학에서 기인한다. 문화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으며 문화수용과 계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동양의 모든 문화가 안동에 유입되었고 유입된 이후 안동만의 가치관으로 재편성되어 꽃을 피운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화엄종"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 "성리학" -과거급제자(대구280명, 부산 160명, 안동850명) 그리고 일제시대 독립운동이 최초 발생지이며 321여명의 독립유공자(서울 115여명)

-안동현재 약 47곳의 동성마을과 78개소의 종가와 남아 있음

▣ 재사를 지내는 의미 (안동음식 이야기)
안동간고등어의, “어두일미”이라는 이야기에서 ‘자식이 편안한 마음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 ‘등 푸른 생선의 영양과를 설명하고, 안동지역 별미인 “헛제사밥” 즉 재사음식을 준비할 때 입에 한지를 붙어 혹시나 흐트러지는 행동을 다잡았고, “조율이시”를 통하여 “팔도를(배-씨가 8개) 다니면서 육판서를(감-씨가6개) 지나 삼정승이(밤-새 껍질) 되어 세상 최고가(대추-씨가 하나) 되어라.
그리고 그 길을 갈 때는, 명태포를 올리는 의미 즉 두들기면 두들 수록 부드럽고 맛이 있게 되는 이치는 세상 속에서 “경청”을 하라는 이야기로 부모, 스승 그리고 세상의 좋은 이야기를 잘 수용하면 세상의 큰 재목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가볍게 생각 할 수 있지만 선생님과 부모님의 가르침에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부모입장에서 화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의 한손이 5개인 것은 부모님(주변)의 가르침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데, 그것은 “오해는 세 번만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5-3=2 : 다섯 손가락을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받거나 잡을 수 없지만 모두 펴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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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회별신굿탈놀이 소개
굿의 목적은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있다.
이러한 굿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제물(祭物)을 마련하여 서낭신(城隍神)에게 당제사를 올린다. 그러나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서 굿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행위를 주술(呪術)이라 한다. 주술적인 행위로는 비슷한 행위를 함으로써 그와 같은 일을 성취한다고 믿는 것과 어떤 결과를 기대하면서 그 결과와 비슷한 일을 미리 행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마을 굿을 통하여 별신굿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주술적인 행위로서 탈을 만들고 탈춤을 추게 된 것이다.
■하회탈 : 탈은 세상에 잘못된 일을 트집
잡아 부여 주는 구실
예)탈도 많다, 이사람 무슨 탈 이 생겼나? 등
“탈”은 변고나 사고를 듯함■이메 : “뭐 이매이가 있노”! -사람을 하찮게 하는 말 즉 바보
- 미완성 ▷우리의 삶은 미완의 인생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고 인간적 감정에서 해방되어 있게 늘 웃는 포정으로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하회탈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성한 이야기의 신화 같은 역할 - 이메탈(만든 유래-허도령)을 증거로 한 전설이 없었다면 다른탈은 모두 사생아가 될 뻔 했음
- 결국 금기를 어긴 사랑이 “탈”이 됨

■ 하회별신굿 탈놀이 각 마당 소개

1. 무등마당
서낭당에서 신내림을 받은 놀이패가 마을로 내려온다. 이 때에 서낭대를 앞세우고 각시는 무동꾼의 어깨위에 무동을 탄다.
각시탈은 성황신의 현신(顯神)으로 받들어져서 땅을 밟지 않고 무동을 탄다. 팔을 아래위로 흔드는 행위는 이 땅에 축복을 내리는 것. 나중에 각시가 걸립도 함

각시가 무동을 타고 마을로 들어오는 것은 마을 수호신인 성황신을 마을로 맞이하는 것을 상징하며 이는 곧 평안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옷가지를 서낭대에 걸고 각시의 걸립에 응하는 것은 신의 힘을 빌어 덕과 복을 받으려는 신성(神性)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 주지마당
상상의 동물인 주지 한 쌍을 등장 시켜 탈판(곧 마을)을 정화하는 것, 암.수의 싸움에서 암컷이 이기고 모의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곧 생산을 북돋워 풍농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인 것이다.

3. 백정마당
소의 배를 갈라 염통과 소불알을 떼어 구경꾼들에게 염통과 우랑(牛囊-소의 불알)을 사라고 희롱한다.
백정은 몽두리 춤의 거침없는 몸짓과 소를 단숨에 때려잡는 행위를 통하여 신분차별에서 오는 제도적 모순에 저항하고, "공자도 자식을 놓고 살았다"고 하면서 " 자식을 볼 려면 양기가 있어야 되고 양기가 쎌려면 바로 이 소불알을 먹어야 한다"고 외치는 행동은 겉으로는 성을 금기시하며 은밀하게 성을 즐기는 유교체제의 도덕률과 양반들의 도덕적 위선을 비판한다.

4. 할미마당
쪽박을 허리에 찬 할미가 등장하여 베를 짜며 궁핍하게 살아온 신세타령을 베틀가로 읇는다.
베틀가의 내용은 시집간지 사흘만에 과부가 되어 겪는 고통과 삶의 애환이 절박하게 표현

베틀가가 끝나면 영감과 할미의 청어 먹은 다툼이 벌어진다.

" 할마이 내가 어제 장에서 사온 청어는 다 먹었나? "라고 물으면 " 어제 저녁에 당신 한 마리 내가 아홉 마리, 오늘 아침에 내가 아홉 마리 당신 한 마리 한 두름 다 먹었잖나 " 라고 반박한다. 청어 한 두름을 독식한 할미의 대응을 통하여 가부장적 권위를 부정하고 남녀 간의 상하관계를 뒤집어 버림으로써 하회질서에 저항하는 민중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 또한 기득층의 모든 부(농사, 음식)는 서민들의 피땀이며 모든 것이 우리손을 거쳐서 가는 것을 인정이라도 해 달라는 요구.

5. 파계승 마당
부네가 등장하여 고운 자태를 뽐내며 매혹적인 오금춤을 춘다. 흥에 겨워 춤을 추던 부네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주위를 살핀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치마를 살짝들고 소변을 본다.
이 때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스님이 이 광경을 보고 여인의 오줌냄새를 맡고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종교적인 계율의 굴레를 떨치고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 세속적인 삶을 즐기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금
*초랭이가 나와서(턱이 붙어 있고 입은 삐듬-입은 삐들어도 말은 바로 해라! ) 스님과 부네를 놀림 - 스님은 그 바뿐 와중에도 부네를 업고 도망감.

*양반선비마당 전에 이메(바보탈-턱이 없음)를 불러냄
-이메가 나타 내는것은 괜한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서로에게 편하게 하면 다 행복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가족, 사회 등 공동체사회에서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는 미덕.

6. 양반선비마당
양반과 선비가 거들먹거리며 등장하여 춤을 추다가 서로 부네를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게 된다. 양반과 선비는 서로 자기의 지체가 높고, 학문이 깊다고 다툰다. 백정이 소불알을 들고 나타나 "양기에 좋다"고 하자 소불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 이건 내 불알일세 "라고 하며 다툰다. 이러한 대립구조를 통하여 지배층의 위선과 가식을 여지없이 드러내게 된다.

이 마당은 지체(신분)와 학식을 내세워 군림하는 당시 지배계층들의 사회적 근거를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부정해 버림으로써 탈놀이의 전승 주체인 상민(민중)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탈춤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지배층의 권위를 탈잡아 비판하고 민중들의 억눌려 있던 숨구멍을 터주는 통풍구 기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줌으로써 화합하고 협력을 통한 상생(相生)의 정신을 추구하였으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초량이가 말하는 육경의 의미
현실적인것이 중요하다. 팔만대장경(문화재) 중의 바라경(불경), 봉사의 안경(앞의보는 것), 약국의 길경(상처치유), 처녀의 월경(새로운 생명 탄생) 노비의 세경(우리의 봉급)



하회마을 감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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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가면 있고 특히 하회마을에도 집집마다 있는 감나무
감나무가 단순한 과실나무가 아닌 이 땅 어머니들의 삶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것을.
본디 열매를 맺는 감나무는 씨앗에서 나오지 않는다. 감나무는 반드시 고욤나무 뿌리에 접을 붙여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밤별처럼 많은 꽃을 피우지만 꽃들마다 열매를 매달지는 않는다. 또 열매를 매달았다고 해도 가을까지 온전히 품고 가지 않는다. 결국 고욤나무에 시집을 오고, 잠시 찬란한 행복을 맛보지만 수많은 자식을 품고 긴 여름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런 고생 끝에 열매를 맺었지만 결국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람이나 새들에게 내주고 만다. 그리하여 홀로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이 또한 어머니와 닮아있으며 더 놀라운 것은 감나무 줄기 속에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딘 감나무의 속을 갈라보며 어김없이 까만 먹물이 들어있다. 이를 흔히 먹감나무라 부르지만 기실 이것이야말로 평생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 쓴 어머니들의 가슴 속이 아니겠는가. 속이 타서 까맣게 변해버린 고단했던 일생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감나무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과 가까운 나무였으며 사람에게 이로운 나무였다. 밭 귀퉁이 마당 한 쪽, 뒤란의 돌담 사이에 아무렇게나 서 있지만 어떤 불평도 없이 매년 튼실하게 열매를 매달아 주던 나무.
그 감나무를 정성스럽게 이엉으로 감싼 다음, 안에 넉넉하게 퇴비를 넣어주기로 한다. 제발 얼지 않고 꿋꿋하게 긴 겨울을 견뎌주기를 바라면서.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다. 어느새 우리 집 마당에 단정하게 서 있는 감나무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하회마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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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회마을 유래

☞특이점(다른 마을과 차이점)
1. 사거리가 없다. 대부분 삼거리 / 서로에 되한 배려로 마주보고 집을 짓지 않음 그래서 골목길도 넓다.
2. 우물이 없고 담장이 흙담 _ “행주형” 죽 배의 형상이여서 마을의 기원을 가라않지 않토록 하기 위함
3. 집 방향이 동,서 남, 북, 모두 있음.

-하회마을은 김해 허씨 터전에 광주안씨 문전에 하회 류씨 배판
*김해허씨가 1,200여년전 거묵실(화산 남쪽)에 처음 정착, 광주안씨가 화산 북쪽에 850년 전에 정착 후 1970년대 초반까지 살다가 모두 이주함. 풍산류씨가 650년 전에 지금 양진당 자리에 터잡았고 서애 류성룡 대에 와서 왕성하게 됨
☞ 하회마을의 지형은 동쪽으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해발(海拔)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줄기의 끝이 마을 안까지 뻗혀 마을의 지형은 마치 손등과 같은 아주 낮은 골을 짓고 있으며, 남서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의 남산(감투봉)과 원지산(遠志山)이 솟아있고 마을의 북쪽으로는 화천(花川)의 대안(對岸)인 부용대(芙蓉臺)의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우람하게 솟은 부용대의 절벽이 낙동강 상류 폭 200∼300m의 화천을 동(東)에서 서(西)로 흘러와서 다시 동으로 역류하였다가 또 서쪽으로 구비치게 하여 동류수(東流水), 서류수(西流水),의 별칭을 갖게 하고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모양 : 대대손손 풍요로운 땅
행주형:배에물건을 가득실고 출발하는 형상 -희망을 가득실은배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상징하여 발복의 땅
이중환 택리지“강거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의 제일은 하회라 극찬
삼남의 4대 길지 : 하회마을, 안동의 도산과,천전, 봉화닭실 : 땅의 기운이 좋아 후손들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곳


◉하회마을 풍수(290동 기와113동, 초가84동 기타93동, 인구118세대 320명 (2015년)
-마을풍수 기본 : 배산 임수형-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을 끼고 있어야 바람을 막고 물을 구할 수 있다.
▶여기에 산과 물 그리고 방위도 맞아야 함
특히 땅의 생기가 충만한 곳 그리고 땅에서 발생되는 기가 흩어지지 않고 잘 갈무리 할 수 있는 곳 이여야 함 땅의 생기가 충만한 곳을 ‘혈’이라고 한다면 ‘혈’을 중심으로 갈무리하는 지세 - 좌청룡, 우백호, 남 주작, 북현무, 즉 혈이 한 곳에 모이고 이 혈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형성되어 있는 땅이 명당 - 하회마을 -혈 : 삼신당
-일월산의 지맥 화산이 주산으로 현무
-남산과 낙동강(화천)좌청룡
-북쪽절벽에이어지는 화산 가지가 우백호
-화산의 규봉의 생긴 모습이 8대 정승을 배출하는 지형 그래서 서애가 정승이 된 후8대 뒤에 정승이 났으며 뒤에는 계속 정승감이 난다고 믿음
-화천건너 서쪽에있는 윈지산이 마을의 안산 격인 주작 - 원지산 뒤쪽에 만운봉
-남쪽 일월산지맥 남산 - 그 봉우리를 ‘감투 봉’ 감투는 곧 벼슬 따라서 하회에 높은 벼 슬을 차지할 인물이 많이 날 수 있다는 뜻
-마을의 혈 : 일월산의 지맥이 화산-그리고 충효당의 뒤뜰(현 잔디밭)에 이르렀고 잠시 수그러들었던 지맥이 다시 솟구쳐 응결한 곳이 삼신당과 양진당 자리
-원지산과 부용대 사이가 허한 곳 -허 한곳을 비보 숲으로 만송정 조성 : 북서풍을 막아주고 화천의 범람, 방풍 방수림구실

■ 김해 허씨, 광주 안씨, 풍산 류씨
-허씨 : 화산자락의 따뜻하고 넓은 양지 쪽(거묵실)
▷ 허도령이 하회탈, 서낭당과 같은 동신당들이나 동제와 같은 여러 공동체 단위의 제의도 허씨들의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 - 고려중기 이전의 터를 잡은 허씨들의 문화수준이 상당했음을 나타냄
-안씨 : 늦게 터잡은 관계로 북서쪽 궁핌한 생활
▷ 안씨부부 - 쓰러진 행각승 보필 - 은혜에 보답코자 - 후대에 정승이날 길지 또는 당년에 천석을 하는 명당 중 하나 선택 - 안씨부부 궁핑 때문에 당년에 천석수확 할 명당선택 - 스님이 정해준 명당으로 부모의 묘 이전하니 그해 여름장마가 지고 물길이 바뀌더니 지금의 섬들에 드넒은 개펄이 생겨 그곳에 쌀은 심지 못하고 피를 뿌러 천석의 피를 수확 함 그래서 안씨 묘를 ‘피천석묘’ 라함

하회마을 소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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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댁(현재 54칸)
-경상도 도사 류도성이 1862년에 건립 - 하회마을의 최고으뜸인 “나눔과 배려”를 함
1.풍수지리학적 - 연화분수형의 중심에 위치
2. 연꽃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상징성에 의해 명당 : 연꽃은 꽃과 씨앗이 함께 있어 풍요와 다산
3.뒷간에 안과 대문 밖에서도 볼일을 볼 수 있도록 건축 - 길 가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 또한 그 당시 거름 퇴비로 활용하는 것으로 아주 현실적이고 경제적 이였다는 것
4.신분(하인:별채 뒤편에 위치함)에 따라 남 ,녀에 따라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구분, 즉 내거노비들 출퇴근을 하도록 하여 자유시간을 부여함. / 북촌유거 뒤편에 작은 대문을 통하여 출퇴근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공간을 별도로 만든 것- 우리주상들의 어른 공경하기를 엿볼 수 있음.

5.소작농에게 후한 싹을 제공 하였으며(보통 지주가 7대3 정도를 하였으나 북촉댁은 최소 5대5) 마을 익사사고가 있었을 때 집을 짓기 위하여 3년 동안 준비하여 둔 봉화적송을 물에 띄워 사람을 구하는데 사용함
6.북촌유거 뒤뜰에 있는 소나무가 하회마을 물 흐름가 거의 일치함(보호수로 지정됨)
7.솟을대문 상층 홍살문이 있는 곳에 가마니에 양식을 넣어 두어 배고푼 귀신들 먹고가라고 배품
8.뒷간(화장실)을 초가로 하고 밖에서(도로)도 서민들이 급한 용무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함

◉가훈첩(家訓帖)
동기창(董其昌)의 글씨를 탁본한 가훈첩으로, 가문의 성쇠는 자식 교육에 달려있다고 하여 훈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습관의 중요성도 함께 언급하였다. 가훈은 가정의 윤리적 지침으로서, 가족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덕목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다.

■ 삼신당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혈(穴)에 해당하는 곳으로, 행주형(行舟形)인* 짐을 가득실고 출발준비가 끝난 나룻배). 하회마을의 돗대 역할을 이 나무(삼신당)가 한다고 보았다.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이 느티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동티(재앙)를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신(紳)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安寧)을 비는 동제(洞祭)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하여 졌다고 한다. 풍산류씨 입향 류종혜 공이 심은 느티나무로 수령은 600년이 넘는 삼신목이다.
삼신은 아이가 없는 여인이 아기를 점지해 주고 출산을 도우며 그아이의 성장을 돕는 신. 삼신은 각 집안의 안방에 신체를 두고 모시는 것이 일반적 하회는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의 운명을 좌우하는 명당으로 옛날부터 하회별신굿이 벌어지는 신의 영역이다.
-현재 이러한 민속신앙 사라짐
1.일제 : 굿, 동제 - 미신으로 취급
2.새마을운동-신식으로 집을 지으면서 없어짐

◉학록정사
풍산금속 류진 회장(부친 (고)류찬우 회장이 별장으로 사용 / 2016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만찬장

◉양진당(보물 306호)
-하회마을 대종가 : 고려말 전서 류종혜이 화산에 올라 하회마을이 좋은 터임을 알고 자리를 잡은 곳
특징 : 마을에 있는 소나무로 지은 집
* 조선전기가옥, 하회에서 유일한 정남향 집
* 부연(지붕하단에 한단 더나 것으로 궁궐 사찰 등 공공장소에서만 가능- 양진당은 그 법이 적용되기전인 고려말이나 조선초기에 건립 됨), 음각대(벽채에 문양)
* 기동(고려시대-중간부분이 불룩하고 상 하가 좁아집-봉정사 극락전)
* 사랑채지축이 높은 연유 :제청, 공청(제례-공공의 기능) - 1년에 13번의 제사
*마당에 마사토(도둑이 못 들어오게 소리가 남)
*사랑채 계단 두 개- 아들은 꿈과 희망 그리고 노력을 하도록 ‘문필봉’이 계단아래에서 그리고 아버지는 계단위에서 보이도록 함.(아이가 아버지 위치에서 가서 잠시 훔쳐보기도 함)
*자다가 봉창 두두리는 소리 / 출 행량 지는 이야기

■ 충효당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서향집 : 추운겨울을 대비 이중 문
-사랑채 뒤편 : 사당(류성룡선생의 불천위)
-충효당 현판 : 현종에서 숙종대에 걸쳐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 이 쓴 전서채
-사랑채: 안부사(줄)
■서애 류성룡(1542-1607)시호:문충공
이황의 문인 유학자 이면서 행정,전술,무기,축성,의술등에 두루밝아 임진왜란시 재정,외교, 군사를 총괄하는 지휘에 올라 최후의 승리를 이끔
-이순신, 권율장군 발탁, 징비록(국보제132호)
-충효당 현판은 현종에서 숙종대에 걸쳐 남인의 영수였던 정치가 미수 허목이 쓴 전서체, 행서의 필법을 전서에 응용하한 독자적인 서체를 보여주고 있는 미수 허목은 조선시대에 이미 글자 디자인 즉 타이포그라피를 시도한 진보적인 서예가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곳 충효당에 허목의 현판이 걸려있는 것은 학맥과 관련이 있다. 퇴계 이황선생의 고제(高弟 덕과 학식이 높은 제자)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를 이야기 한다. 허목은 바로 한강 정구의 제자이므로 스승의 사형인 서애의 유택에 현판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더욱이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를 썼는데 그곳에서 류성룡의 적절한 인재등용을 높이 평가 했다. 임진왜란당시 서애 류성룡은 권율과 이순신 장군을 천거 했는데, 당시 둘은 모두 하급문관이어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안았었다. 이들의 천거는 당시 모험일 수 있었으나 류성룡은 과감하게 이들을 등용,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충효당 뒤편에 있는 사당은 영의정을 지내고 풍원 부원군에 봉해진 공경대부를 모신 집이어서 사당을 이렇게 크게 지은 것 이며 바로 앞 소나무가 “만”가지가 있다고 하여 만송이라 하는데 자식들이 만대에 걸쳐 잘되라고 하는 의미와 사당 바로 앞에 심은 것은 자식을 늘 가까이에서 돌봐달라는 의미에서 심었다.
사당 앞으로는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있으며,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고졸한 충효당과 잘 어울리지는 않는 편이다.

영모각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며, 이곳에는 서애 선생의 대표적인 저서인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과 고문서(보물 제160호) 그리고 유물들(보물 제 460호)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징비록은 순회 전시를 위해 나가 있어서 복제본만 볼 수 있었으며, 1592년 서애 선생을 푸원부원군에 임명한 '만력(萬曆) 31년' 교지 등은 원본을 볼 수 있다.


하회마을 형제 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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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우애 - 겸암과 서애
■왜적을 물리치는 노래 “쾌지나 칭칭나네
- 겸암선생이 사흘뒤에 너를 죽이기 위해 일본에서 자객이 올것이다. 니는(서애)아들들을 시켜서 가등청정나오네 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킴
몇칠 후 자객이 마을입구에서 노래들음- 겁을 먹고 감- 하지만 차제에 죽이기로 마음 먹음 - 겸암이 다시 동생보고 몇일뒤에 또 자객이 와서 내기 바둑을 하자고 할것이라 함 - 그러면 넌 거울앞에 자객은 거을 및에 내가(겸암) 뒷방에서 바둑을 놓을 자리를 가르쳐 줌 -
반도 안두고 자객이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줄행량을 침
그 일로 임진왜란당시 아무 피해도 없었음.

- 바둑으로 퇴치한 일본 밀정
앞서 언금 한 봐와 같이 그냥 나 두어서는 안될 인물인 것을 간파하고 음해할 계획을 세움
▷ 한날 겸암은 동생서애에게 바둑 한판을 제의 함, 그 당시 서애는 바둑에 조애가 깊어 나라에서 국수로 인정 받고 있는 터에 평생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한 겸암형님이 박둑을 청하니 서애는 수의 고하를 논하기 보다는 형님과 대화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자고 허락함
-문제는 대국을 하기위하여 돌을 가리면서 일어났다. 그만한 것은 알만한 형님이건만 당연히 백을 쥐는 자신을 밀치고 백을 빼앗은 게 아닌가.(수고자 집백)은 바둑의 예의다. 겸암은 다만<길고 짧은 것은 대 보아야 안다>는 말 뿐이였다. 수가 같은 경우에는 연장자가 백을 쥐는게 상례
- 그런데 어쩐 일인가. 서애는 이내 긍지에 몰려 빠져나올 묘안이 없다. 뜻밖에 고민하는 서애에게 겸암은 웃으며 36여수를 훈수해 주었다. 서애는 형님의 감추어 둔 바둑 수에 탄복.
- 계가(計家)를 필요치 않을 정도로 대패한 서애에게 겸암은, <오늘 석양에 낯모를 중이 와서 바둑내기를 하자고 할게고, 숙박을 청할 것이다. 그를 절대로 재우지 말고 내개 보내라>는 당부를 했다
- 과연 석양이 되니 초라한 행색의 중이 당도하여 형님 말씀대로 바둑내기를 청했다. 더 이상한 것은 바둑을 두는데 착점이 낮에 형제간에 두던 그대로가 아닌가. 이상히 여기면서도 미리 배운36여 수를 동원해 바둑을 승리로 이끈 뒤,<오늘은 집안에 제사가 들어 외인을 재우기 어렵습니다. 물 건너에 형님이 거처 하는 정자가 있으니 그리 가서 주무시지요> 라고 했다.

- 겸암은 물 건너 겸암정에서 그 중을 재우다가 한밤중에 그 품을 뒤져 비수를 꺼내서 목에다 대고 호통을 쳤다.
그 일본 밀정은 혼비백산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겸암은 목이기는 척 하면서 제갈량의<팔도진법>을 설치해두고는 내 보내는데, 중은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 였다. 겸암을 술법임을 안중은<오늘 이후로는 절대로 망상을 하지 않겠습니다.>라 다짐하고 백 배 사죄 후 길을 떠 날러고 했는데 겸암은 업전 두 냥을 주면서 <신이 떨어 졌구나.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장터가 있을 터이니 거기서 사서 신고가라> 과연 지시대로 가니 풍산 구담 장터가 있느데, 발에 꼭 맞는 특대 짚신 한 켤레가 있었다. 물어보니 그 대금이 엽전 두 냥이므로 겸암의 지시와 부절(符節)을 합한 것 같았다. 이에 겸암이 위대한 이인(異人) 임을 깨닫고 하회부근에는 얼신도 하지 않았다 한다

* 참고
1. 밀정으로 온 중은 현소라는 인물인데 뒤에 만냥의 현상금을 걸고 잡아 죽이려 한 일본군의 주요 인사였다. 2.세상에는 아재비 ‘숙’ 자로 인해(치숙일화) 숙질간의 이야기로 오해하기도 하나 형제분 사이에 있었던 일로 전해짐. 서애에게는 숙부나, 서숙부가 계시지 않았다.

▶효친사상 - 겸암 형제의 부모님 공양 - 겸암굴
- 임진왜란 당시 서애는 형인(백씨) 겸암에게 모부인과 가솔들의 피난을 부탁 했고, 자신은 임금을 호종하며 국난 극복에 앞장 섰다. 이를테면 형제간에 충과 효로 역할을 분담을 함

-섬나라 사람들에게 쫓겨 80이 넘는 노모와 젓먹이 까지 딸린 100여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서울에서부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가, 급기야는 영남 땅 예천 겸암굴(예천군 상리면 고항리 소재)굴속까지 은식 해야 했던 비극사 였다 . 그래도 동셍 서애를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정공을 세웠고, 겸암은 예지로 100여 가솔들은 한 사람의 탈도 없이 모두 안전하게 난리를 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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